다음날 아침은 공기가 눅눅했다. 슈퍼 유리문에 희미한 김이 앉았다가 금세 사라졌다. 양춘자는 계산대에 앉아 동전 쟁반을 반쯤 돌려놓은 채, 바코드 스캐너의 붉은 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 앞에서 그림자가 멈췄다. 종은 울리지 않았다. 유리에 비친 밝은 색 원피스가 먼저 들어왔다. 조금 뒤, 검은 실루엣이 겹쳐졌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문을 열며 말했다. 웃음이 먼저 들어오고, 목소리는 반 박자 늦게 따라왔다. “지난번에 스쳐 인사드렸죠? 사장님 맞으시죠?”
양춘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때… 앞에서.”
“맞아요, 그때요.” 여자는 익숙한 사람처럼 시선을 오래 맞췄다. 밝고 정중했지만, 조금 길었다. “저는 최윤아예요.”
뒤에서 남자가 들어왔다. 종이 그제야 가볍게 흔들렸다 멈췄다. 그는 말없이 매대 끝을 스치듯 보았다. 계산대 옆 열쇠고리의 금속 링, 발판 고무의 닳은 자국, 유리문 바닥 레일에 고여 있는 가는 모래. 시선이 오래 머무르지 않는 대신, 어김없이 무엇인가에 잠깐씩 멈췄다.
“요즘 손님 많으시죠?” 윤아가 물었다. “학생들이 돌아오니까요.”
“예, 뭐… 그럭저럭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계산대 위 동전 쟁반에 닿았다. 쟁반은 카운터 선에서 미묘하게 빗겨 있었다. 양춘자는 그걸 알아차리고 손끝으로 쟁반을 반 뼘쯤 당겼다. 남자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덥네요.” 윤아가 가방에서 얇은 천을 꺼냈다. 동그란 점이 두 개 붙어 있는 작은 종이 카드였다. “문이 조금만 세게 닫혀도 소리가 크죠? 벨도 같이 울리고. 이거 문고리 완충 패드예요. 여기 네 귀퉁이에 하나, 그리고… 벨 끈 닿는 데 하나. 붙여두면 손님들이 덜 놀라세요.”
양춘자는 그 작은 점들을 내려다보았다. 회색 펠트였다. 손톱으로 만지니 부드럽고, 접착면이 반짝였다. “아, 이런 것도…”
“선물로 드릴게요.” 윤아가 웃었다. “붙이는 위치만 잘 잡으시면 돼요. 여기 모서리, 여기—” 그녀는 유리문 턱과 벨 끈이 닿는 점을 손끝으로 짚었다. “이렇게 하면 소리가 훨씬 부드러워져요.”
남자가 계산대 옆,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초침이 매끄럽지 못하게, 가끔 반 걸음씩 멈칫거렸다. “시간이 조금 느리네요.”
“배터리를 바꿔야 하는데, 자꾸 까먹어요.” 양춘자가 대답했다.
“일하시는 분들 오시는 시간이, 시계보다 먼저 오죠.” 남자가 낮게 말했다. “그래서 바꿀 타이밍을 더 놓치고.”
말끝이 짧게 끊겼다. 설명 같지 않은 말이었다. 양춘자는 갑자기 편의점 야간 배송차가 새벽마다 이 골목을 미끄러지듯 통과하던 소리를 떠올렸다. 자신이 늘 두 번 듣는 소리. 멀리서 한 번, 문턱을 건너며 한 번. 오늘은 첫 번째 소리만 있었던 것 같았다.
“이 동네 참 조용하더라고요.” 윤아가 말을 이어 붙였다. “그래서 더 잘 들려요. 사람들 숨소리 같은 것들.”
남자가 수첩을 꺼내지 않은 손으로 계산대 모서리를 한 번 가볍게 눌렀다. 아주 미세한 흔들림이 있었다. 고정 나사가 하나 풀려 있는 자리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손을 거두고, 시선을 유리문 바깥으로 옮겼다. 문턱 앞 타일에 헤어라인처럼 가는 금이 번져 있었다. 금의 끝이 문 그림자와 정확히 겹쳤다.
“지난주에 비가 세게 왔었죠?” 남자의 첫 문장은 물음표가 아니었다.
“그랬죠. 하수구가 좀 넘치고.”
“그럼 이 선, 더 벌어지겠어요.” 그는 타일의 금을 보며 말했다. “문이 닿는 쪽부터.”
양춘자는 문턱을 바라보다가, 벨 끈의 매듭으로 시선이 옮겨지는 걸 느꼈다. 벨 끝 작은 철심이 부딪히는 자리. 윤아가 조금 전 짚어 준 자리. 그 자리에 펠트 점 하나가 붙는다면— 종소리는 어떻게 될까.
윤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사장님, 요즘 보험 안내 받으시는 분들 많아요. 여기는 물건도 많고, 전기선도 많고… 여름에는 작은 일들이 크게 번지곤 하거든요.”
양춘자는 무심코 손을 씻는 동작처럼 앞치마를 문질렀다. 습관이었다. 손바닥이 젖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그 동작을 보지 않은 사람처럼 시계를 다시 보았다. 초침이 한 칸을 건너뛰었다. 그는 아주 짧게 숨을 들이켰다 놓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붙여드릴까요?” 윤아가 완충 패드 두 장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벨 끈 쪽은 살짝만. 소리 결이 달라져요. 손님들한테 좋아요.”
“제가… 해둘게요. 나중에요.” 양춘자는 말하고 나서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운터에 작은 봉투를 내려놓았다. 봉투 안에는 회색 점 두 개와, 투명한 점 하나가 더 들어 있었다. 투명한 건 더 단단해 보였다. “혹시 모서리 말고도 소리를 줄이고 싶은 데가 있으면, 이걸로도 해보세요.”
남자가 유리문을 미는 대신, 문틀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문은 아주 약하게 흔들렸다. 종이 울릴 듯 말 듯, 금속이 서로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숨을 죽였다. 그는 그 소리를 듣는 사람처럼,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다음에 또 올게요.” 윤아가 말했다. “더운 날 조심하시고요.” 그녀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웃는 동안에도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가자 유리문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종은 울리지 않았다. 양춘자는 한동안 봉투를 열지 못했다. 회색 점 하나가 봉투 안에서 뒤집히며 반짝거렸다. 투명한 점은 빛을 삼킨 것처럼 어두워 보였다.
오후에 비가 한 번 쏟아졌다 멎었다. 골목이 식었다. 양춘자는 문턱의 금을 한 번 더 살폈다. 금 끝이 문 그림자와 겹치는 지점에, 아주 작은 얼룩이 생겨 있었다. 물이 말라가며 남긴 테두리. 그 곁에, 윤아가 짚어 준 자리들이 떠올랐다. 네 귀퉁이. 그리고 벨 끈이 닿는 점.
닫히는 소리를 줄이는 건, 여는 소리도 바꾸는 일일까. 양춘자는 봉투를 들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계는 여전히 느렸고, 초침은 가끔 두 번 쉬었다. 그 잠깐 사이에, 누군가 문턱을 넘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 소리도 없이.
늦은 오후, 가게 안은 다시 고요했다. 바깥에서는 아이들이 달리는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양춘자는 카운터 서랍에 넣어둔 봉투를 계속 의식했다. 열어보지 않아도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선명히 느껴졌다. 회색 점 두 개, 투명 점 하나.
그 점들이 슈퍼 안 공기를 눌러앉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환풍기를 켜도 무겁고 눅눅한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았다.
“사장님.” 문이 열리고, 옆집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종은 이번에도 미묘하게 늦게 울렸다. 아주머니는 고등학생 딸아이의 간식을 사러 온 길이라고 했다.
양춘자는 웃으며 대꾸했지만, 웃음은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는데, 자꾸 도현의 낮은 목소리가 겹쳐졌다. *’지난주에 비가 세게 왔었죠?’* 그 말이 다시금 저울처럼 귓가에서 출렁였다.
“아직도 이 시계 안 고치셨어요?” 아주머니가 벽 시계를 흘깃 보며 말했다. “맨날 느리잖아요. 이러다 시간 잘못 보고 장사 마감하시겠어요.”
양춘자는 무심코 시계를 바라봤다. 아주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방금 그 순간에도 초침이 또 한 칸 멎어 있었다. 그 짧은 멈춤이, 마치 누군가 일부러 눌러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게요. 바꿔야 하는데…” 목소리가 작아졌다. 양춘자는 자기 입에서 나온 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아주머니는 과자를 사들고 나갔다. 문이 닫히고 종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이번엔 소리가 유난히 길게 이어졌다. 금속이 흔들리며 땡, 땡— 여러 번 울린 듯한데, 귀에는 반쯤만 들렸다. 나머지 소리는 허공으로 삼켜진 것 같았다.
양춘자는 종이 멎자마자 카운터에 앉았다. 손끝이 저절로 서랍을 열었다. 봉투 안에서 패드 하나를 꺼냈다. 회색 점. 아무 냄새도 없는데, 코끝이 싸늘해졌다. 붙이지도 않았는데, 이미 소리가 줄어든 듯 슈퍼 안이 정적에 잠겼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누군가 문 앞을 지나갔다. 하지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 골목은 비어 있었다.
양춘자는 호흡을 멈추었다. 도현이 카운터 모서리를 가볍게 눌렀을 때의 손가락 압력이 떠올랐다. 별것 아닌 제스처였는데, 그 순간부터 가게 안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시계, 문, 종, 금 간 타일. 그리고 자신.
누군가 다시 발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이번에는 그림자가 유리에 스쳤다. 너무 느린 속도였다. 양춘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갔다. 골목은 비어 있었다. 그러나 유리문에 남은 손자국 같은 얼룩이 은근히 반짝였다. 방금 누군가 닿았던 자리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봉투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봉투 속 작은 점들이 심장 박동과 함께 덜컥거리는 듯했다.
다시 슈퍼 안을 돌아봤을 때, 계산대 위 쟁반이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양춘자는 그것을 곧장 반듯하게 돌려놓았다. 그런데 금세 또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빛 때문인지, 손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유리문을 스치던 그림자는 어느새 사라졌다. 그러나 양춘자의 뒷목은 여전히 누군가 시선을 주고 있는 것처럼 서늘했다. 도현이 앉아 있던 듯한 자리에서, 그의 침묵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어둠이 내려앉자 슈퍼 안 공기는 더 눅눅해졌다. 골목 가로등 불빛이 유리문을 통해 길게 번졌다. 양춘자는 계산대에 앉아 봉투를 바라봤다. 서랍 속에 넣어두었는데도, 그 존재가 가슴팍까지 올라와 숨을 누르는 것 같았다.
분명히 사람 발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하지만 가까워지지 않았다.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일정한 간격으로만 반복됐다. 유리문 너머를 내다봤을 때 골목은 비어 있었다.
그녀는 카운터 모서리를 붙잡았다. 조금 전 도현이 눌렀던 자리였다. 그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사가 풀린 듯 흔들림이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오늘따라 그 흔들림이 자신을 향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시계가 또 한 칸 멎었다. 초침이 떨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 짧은 정적 사이, 마치 무언가 다른 소리가 끼어든 듯했다. 종이 울리려다 멈춘 금속음, 누군가 가볍게 수첩을 탁탁 치는 소리.
양춘자는 서랍을 열어 봉투를 꺼냈다. 투명한 점 하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불빛을 받자 빛을 삼킨 것처럼 어둡게 보였다. 붙이지도 않았는데, 이미 유리문 앞 소리가 줄어든 것 같았다. 바람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문턱 금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아주 미세한 ‘딱’ 소리. 마치 안쪽에서 무언가 벌어진 것처럼. 양춘자는 의자를 밀치고 일어섰다. 종은 울리지 않았는데, 유리문 그림자가 흔들렸다.
“사장님, 아직 하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단골인 청년이었다. 하지만 유리문 밖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목소리만 늦게 따라온 듯, 가게 안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양춘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허공에 인사를 건네듯, 고개를 숙였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목소리는 따라오지 않았다.
그 순간, 종이 울렸다. 그러나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금속이 닿는 소리만 허공에서 떨어졌다. 양춘자는 뒤돌아보았다. 계산대 위 동전 쟁반이 다시 기울어져 있었다. 분명 방금 전에 반듯하게 돌려놓았는데.
숨이 가빠졌다. 도현의 낮은 호흡이 귓가에 겹쳐졌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여전히 이 공간에 앉아 있는 것처럼. 웃지도, 움직이지도 않은 얼굴이 슈퍼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양춘자는 봉투를 움켜쥐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보였다. 웃지도 않는데,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는 듯했다. 빛의 착각인지, 아니면—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손바닥 안에서도 도현의 침묵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종이 울린 적이 없는데도, 귓속에서는 여전히 금속 떨림이 이어지고 있었다.